가족사진

진주 류씨 조상 및 항렬

유해영 2023. 10. 23. 15:54

본인의 성씨인 진주류씨의 조상은 고려 중엽 상장군을 지내신 류정(柳挺)으로  무신정권의 1인자 최충헌(4대 60년 집권)의 외조부라고 한다. 아래 「진주류씨 유래」사진을 참조.

 

본인의 성씨 진주류씨의 항렬은 본인이 할아버지 부터, 원0, 0수, 해0, 0형, 승0, 0정, 제0, 0구...이다. 아래 사진 참조

 

본인이 해영, 본인 자식 대형, 준형, 본인의 손주 승우, 승은(아래 사진), 본인의 조카 딸, 현정(류근형의 딸)

 

진주(晋州)류씨(柳氏)
 battery  2023. 1. 1. 13:30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위치도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영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전면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진주류씨(晋州柳氏)의 시조(始祖) 류정(柳挺)은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중서령(中書令)을 지내고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올라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晋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係)를 이어오고 있다. 2세 숙(淑)이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으로 진녕부원군(晋寧府院君)에, 3세 돈식(敦植)은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4세 홍림(洪林)은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홍림의 아들 부(榑)는 진흥부원군(振興府院君), 손자 간(玕)은 진성군(晋城君)에 봉군 되었으므로 6대(代)가 크게 현달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전면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11세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문통(文通)이 사간(司諫)을 거쳐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으며 「청천유고(淸川遺稿)」를 저술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인귀9仁貴)와 막내 인숙(仁淑)이 뛰어났다.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인귀(仁貴)는 정언(正言)에 올라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회덕(懷德)으로 장류(杖流)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의 아들 희령(希齡)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라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일파로 몰려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좌측면
시부(詩賦)에 뛰어나고, 「대동시림(大東詩林)」과 "대동연주시격"을 찬술했다. 한편 사인(舍人)의 아들 우(藕)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명(性命), 육경(六經), 천문(天文)을 비롯하여 복서(卜筮), 율려(律呂), 서화(書畵)에 이르기 까지 정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스승인 김굉필(金宏弼)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혼자 연구한 의술에도 능하여 어머니의 숙환을 치료했고 난세(亂世)에서도 화(禍)한 번 당하지 않고 현명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조인(祖認)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平壤)으로 호종(扈從)하여 세자익위사익위가 되었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우측면
그 밖의 인물로는 조의(祖誼)의 아들 진(縝)이 명종(明宗)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刑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태천(泰川), 단천(端川),평창(平昌) 등지의 군수를 지냈으며 선조 때의 명신(命臣) 근(根)은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대제학(大提學)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구는 근(根의 손자로서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진주군(晋州君)에 봉해졌으며, 사인(舍人) 영(潁)의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 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 전면의 글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肅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나 장희재(張希載)와 공모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 : 이조판서)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찰방(察訪) 천근(天根)의 아들 도삼(道三)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단천군수(端川郡守)를 지낸 진혁(進赫), 이조참판 광주(光周), 돈령부도정(敦零府都正) 원문(遠聞)과 원록(遠綠) 등과 함께 진주류씨를 빛냈다.
 
뿌리공원 진주류씨 조형물에 관한 글
 
류순정,류홍 부자 묘역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 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묘역으로 조성시기도 16c 전반으로 상당히 어른 시기에 속한다. 이 묘역은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류순정이 1512년(중종 7) 53세에 졸(卒)하게 되자 중종이 박원종 졸시(卒時)의 예에 따라 철조삼일(轍朝三日)하고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내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梧柳洞)과 온수동(溫水洞)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如月洞), 작동(鵲洞)에 이르는 약 300여 만 평의 땅을 사여(賜輿)하면서 조성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와 점차 규모가 축소되어 현재의 규모와 배치상태로 되었다.
 
진주 류시 부부묘 석물(晋州柳蒔夫婦墓石物)
 
류형 황해도병마절도사 교지
류형(柳珩, 1566 ~ 1615)은 진주류씨로,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과 강화도에서 공을 세우고, 1595년(선조 28)에 무과에 급제한 후 이순신의 휘하에서 노량대전에 참전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투에서 증전하여 이순신의 총애를 받았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1년(선조 34)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1796년(정조 20)에 총경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802년9순조 2)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류형장군 호패는 상아에 "류형병인생갑오무과(柳珩丙寅生甲午武科)"라고 음각된 형태로 상단 중앙에 류형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상단 우측에는 병인생이라는 생년과 좌측에는 갑오무과라하여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내용이다. 류형장군의 교지는 임진왜란 이후의 인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유형문화재로 관리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