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리 자신 더 잘 알기1

유해영 2023. 4. 6. 10:53

우리 자신 더 잘 알기1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정확하게 아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1. 조선의 신분은 양반, 중인(中人), 상민(常民), 천민으로 나누어지고, 사농공상(선비, 농민, 장인, 상업)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지배 계급인 양반이 3-7%, 피지배 계급인 중인, 상민, 천민이 97-93%이었다고 한다. 나라 발전은 공업과 상업(교역)이 발전해야 되는데 왕권과 소수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최우선이다 보니 나라가 발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교역이 커지면 세력이 형성되고 왕권이 위협을 받으니, 아예 다른 세력 형성을 막았다는 얘기다.

2.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은 것은 양반과 관리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억압이 너무 심해서 억울하고 한이 되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다고 한다.

3. 우리나라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에 대한 대접이 열악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장인으로의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기를 만들어 유럽 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얻어, 유럽과의 교역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현시대에도 우리나라는 기술자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것 같다. 특히 현시대는 과학 기술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다. 기술자들을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4.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신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고 한다. 역술, 풍수, 무속 등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구한말에도 전국적으로 왕실이 주관하여 굿판을 대대적으로 벌렸다고 한다. 막대한 국가 재정을 들여 무당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니, 세계정세에 거의 눈을 뜨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이완용 등 극 소수 만이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도 일간지 신문에 점치는 보살 광고가 전면에 나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있는지 짐작이 간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은 미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시한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인 보고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사냐고 한다. 과학적 합리성을 따르고 미신을 무시하고 살았더니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미신적인 것이 나름금의 심리적 의미는 있다고 보나 그런 수준에서는 빨리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다. 풍수에서 집터가 배산임수, 남향인 곳이 명당이라는 말은 맞다고 본다.

5. 우리나라도 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나라라고 한다. 국내 270 성씨 중에 136개가 귀화 성씨라고 한다. 고려 시대 개성 부근 벽란도라는 곳에 이슬람인 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최소 4만에서 최대 7만 명 정도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귀화인은 중국, 만주, 몽골,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중동 이슬람인, 서양인 등 다양하다고 한다. 왕조 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민족이라는 말이 원래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이라고 한다. 단일 민족일 수가 없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말이 종종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고 민중을 선동하는데 사용되고 있다고 본다.

6. 우리나라 축구 경기에서 붉은 악마 응원단이 있다. 셔츠에 「Be the Reds」라는 영문이 있는데, 그 의미는 「빨갱이가 되자.」 혹은 「공산당이 되자.」라고 해석될 수 있다.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 개선할 점이 있으면 개선해 보자.

7.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지배를 36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청일전쟁 이후 민비/민왕후(명성황후라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사후에 추서된 이름) 시해(1895) 후부터 50년 강압적인 지배를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미 군정 3년 후 1948년 8월 15일 독립이 된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과 독립은 다르다는 말.

8. 상해 임시정부 시절 중국 장개석 국민당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중국이 그렇게 많이 지원한 것은 청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조선이 독립한 후에 중국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려 했다고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이다.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9. 치욕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현재도 미중 패권 경쟁이 극심하고 우리나라의 주변 정세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혹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삼배구고두는 세번 절하고 절할 때 마다 머리를 땅에 세번 조아려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말이다. 여진족에서 항복의례로 행하여 졌다고 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했던 항복 의례다. 삼궤구고두라는 말은 비슷한 의미로 세번 무릅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이다. 당시 인조는 20여번 이상 머리를 조아려 이마에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항복 의례에 비해서 파격적으로 간단한 것이 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청태종 바로 옆 2인자 자리에 앉혀 대우를 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청군 병영에 천연두가 급격히 발생하여 급히 철군 귀국하였다고 한다. 청을 세운 사람은 신라 말 만주로 이주한 김항보라는 사람의 후손인 누루하치이다. 그러나 이런 치욕적인 의례는 그 후에도 청나라 사신이 우리라나를 방문할 때에 왕이 직접 영은문(迎恩門)에 나가 삼배구고두 의례로 사신을 맞이했다고 한다. 영은문은 현재 독립문 자리에 있었고,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앞에 있었다고 한다.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계속됨...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어 보도록 서로서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도 미중 패권 경쟁이 극심하고 우리나라의 주변 정세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우리 국민들이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