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삶

죽음이 두려운 이유, 윤회와 해탈 (BBS불교방송, 법륜) / 불교의 한계점

유해영 2023. 3. 12. 23:44

법륜이라는 분은 정식 스님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친형은 북한 관련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법륜의 이론이 많은 지혜도 주나, 이상적인 데가 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윤회와 해탈 (BBS불교방송, 법륜) / 불교의 한계점

 

얼마 전에 국회에서 법륜스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울러 본인이 생각하는 불교의 한계점을 제시해 본다. 모쪼록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법륜스님의 말씀 요지

1. 모를 때 두려움이 생긴다.

- 감각적으로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 진리적으로는, 지구의 자전/공전의 계속된 반복일 뿐

- 우주는 끊임없는 반복/순환일 뿐, 시작과 끝이 없음

- 무지에서 두려움이 온다.

- 사후의 일, 제일 모르는 일

- 무지/무명이 타파되면 두려움이 없어짐 (해탈)

2.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개발된 처방

- 천당에서 영생

- 윤회 (인도 원주민 드라비다족 사상)

- 두려움이 있으면, 여러 처방 필요

- 두려움이 없으면, 처방 불필요

3. 괴로움의 뿌리: 욕망

- 욕망 성취: 행복이라고 생각

- 욕망 불 성취: 괴로움이라고 생각

- 욕망은 끊임없이 계속 생김, 욕망 성취가 행복이 아님

-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이 해탈이 아님(붓다의 깨닮음)

-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움: 해탈

4. 고(불행) 락(행복)이 끊임없이 반복: 윤회

- 불교의 종교적 윤회: 끊임없이 다시 태여 남

- 진리(dharma, 다르마, 담마)적 윤회: 반복적 고락

- 욕망이 일어나는 것 알아차림: 해탈 증득

- 고락이 모두 사라짐: 고요적정, 해탈, 윤회에서 벗어남

5. 참 자유

- 고요적정, 해탈 열반, 참 행복

-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신의 존재 여부, 천당과 지옥,

육도 윤회 등이 관심 대상에서 사라짐

 

불교 교리에 대한 본인이 생각하는 한계점

위에 제시한 내용은 법륜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논리 정연한 말씀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오랫동안 종교적 탐구를 해 오고 있다. 불교의 한계점이 보이는 것 같다. 2천년 이상 불교가 존재해 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그 자체가 바로 불교의 존재 이유라 할 것이다.

    본인이 파악한 불교의 한계점을 제시해 보겠다. 그렇다고 성당에 다니는 본인이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불교의 교리보다 월등하게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우주관이 훨씬 진리(dharma, 다르마, 담마)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1. 불교의 우주관인 성주멸공/생주이멸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보인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인연(연기법)에 따라 순환할 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생사불이 등의 교리가 참 진리로 보인다.

2. 모든 것은 끊임없이 순환할 뿐임을 깨닫고, 욕망을 끊고 생각을 멈추면 고요적정, 즉 참 자유,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하루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생활인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다. 철없는 자식들을 키워내야 하고 온갖 충동 속에서 살아 헤맬 수밖에 없는 식구들을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명상에 빠져 고요적정에 머물 수 있느냐 이다. 그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 뿐이 아닌가? 근본을 알게 해 주기는 하나, 공허한 이론으로 보인다.

3. 고(苦)와 락(樂)의 기복(起伏)이 사라진 고요적정의 심리 상태가 참 자유에 도달한 해탈의 경지라고 하는데, 한 가지 상태가 계속되면 매너리즘의 심리적 상태가 되어 허망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오히려 반복적인 고락의 기복이 삶의 활력을 주고 인간을 더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주장은 이론일 뿐이고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4. 싯달타 부처님의 구도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살이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쌀농사가 잘되어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기후가 더워 옷이나 거주할 집의 필요성도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날씨가 더워 나무 그늘 밑에서 조용히 명상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싯달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그런 의식주 문제는 전혀 없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의 구도 과정과 내용이 맞지 않다고 본다. 사회인으로서의 보통의 삶속에서의 인생의 해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싯달타 부처님께서 깨달은 위대한 진리라고 해서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적절치 않은 것은 적절치 않은 것이다.

5.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불교의 가르침이 많은 깨달음을 주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생명체인 인간의 사회적 생명원리에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본인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2천 년 이상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있다는 현실이 불교의 존재 이유라 할 것이다. 아마도 종교로서의 불교가 현실적으로 중생의 위안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진리(dharma다르마)로서의 불교 이론은 일견 대단한 것처럼 보이나 현실과는 차이가 있어 실제 삶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모쪼록 앞으로도 불교가 중생 구제에 더 큰 역할을 하기를 희망한다.

    아마도 원불교 교리가 좀 더 개선된 중생구제의 가르침이지 않나 생각된다. 어떤 스님이나 누구든 이와 관련 대화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참 자유, 진리를 찾아보자는 얘기다. 참 자유니, 진리니 하는 것이 있기나 한것인가? 엄밀하게는 없고, 모른다고 본다. 공부해 보자.